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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럼 타는 나무

박산향 2009. 4. 12. 17:19

간지럼 타는 나무  (2005년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연간집) 


파도를 만드는 것은 흥분되는 일입니다. 검초록이던 바닷물이 유리가 깨지듯이 하얗게 부서집니다.
김 선생님은 뱃머리에 앉아서 작은 여객선이 바다를 가르며 만들어내는 파도를 바라보았습니다. 배를 타고 출근하는 첫날이 가슴이 벅차 한 번 더 심호흡을 했습니다.
“히휴!”
옆자리에 있던 나이 지긋한 동료 선생님이 빙그레 웃음을 짓습니다.
“처음이라 그럴 거요.”
“아, 예.”
김 선생님의 마음도 파도를 탑니다.
“이런 오지에 들어오면 발전이 없어. 금방 지겨울 텐데, 원…….”
배의 엔진소리와 바닷물이 갈라지는 소리에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지만 김 선생님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음 띤 얼굴입니다.
군데군데 보이는 양식장에는 스치로폼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나무가 소복하게 자란 작은 섬들을 지나칠 때마다 김 선생님은 생명의 신비함을 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그것도 바위들 틈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바다를 새로운 그림으로 보게 합니다.
작년 봄, 김 선생님은 친구들과 낚시를 하러 왔었습니다. 바다의 잔잔한 숨결과 그 아득함에 넋이 나갔던 그 이후로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바다, 섬마을.
김 선생님이 섬마을 학교로 오고 싶었던 것은 섬의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 풍경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이 바다. 그곳에서는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고 김 선생님이 즐겨하는 수채화가 저절로 그려질 것 같아서 이 섬으로 들어오려고 맘을 굳혔었지요.
4학년 1반. 1반 2반이라 나눌 것도 없이 학생 모두가 9명인 4학년 교실.
김 선생님은 교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험 험!”헛기침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깜장 눈이 김 선생님의 몸을 따라갑니다. 교실 가운데 동그마니 앉아있는 9개의 책상에는 반가움과 두려움의 표정들이 섞여나는데 유리창 너머로 초록의 바다는 둥둥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름을 주욱 훑어보고 아이들과 마주하게 된 첫날은 김 선생님이나 아이들 모두에게 가슴이 두근대는 날입니다.
기훈이, 석이, 현철이, 병준이, 기수, 영아, 유미, 지은이, 성미.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김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불러왔던 것처럼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습니다.
제일 앞에 앉은 기훈이는 선생님께 섬마을의 구석구석을 다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섬에는 간지럼 타는 나무가 있어요.”
“그래? 나무가 간지럼을 탄다구? 정말이에요?”
“예, 맞아요.”
아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그게 어디죠? 나중에 좀 데려다 줄 수 있니?”
“예!”
기훈이의 큰 목소리가 창밖 바다를 향해 달려갑니다.

학교 뒤쪽 동그마한 산으로 향하는 기훈이와 석이의 걸음이 바쁩니다. 뒤따라가는 김 선생님은 풀내음을 가슴 가득 들이켰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풀내음과 뒤로 보이는 바다.
“선생님, 저기요.”
기훈이와 석이가 바로 앞의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미끈하게 뻗은 굴참나무입니다. 위를 올려다보니 가지도 많이 뻗어있고 나뭇잎도 풍성합니다.
“와, 근사한데!”
굴참나무 곁에 서니 저만치 아래로 자그마한 학교와 운동장이 눈에 들어오고, 잔잔한 바다가 내려다보입니다.
“야, 정말 시원하다!”
김 선생님의 한 마디에 기훈이와 석이가 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어떻게 간지럼을 탄다는 거야?”
“보세요. 우리가 여기를 이렇게 쓰다듬으면 나뭇잎이 흔들려요. 간지럽다고 흔들 흔들 그래요.”
“정말?”
“예. 한번 해 보세요, 선생님도.”
기훈이가 굴참나무 둥치를 살살 쓰다듬었습니다. 김 선생님도 따라서 나무를 쓰다듬었습니다.
“맞죠? 저기요, 가지가 흔들리잖아요.”
고개를 치켜 든 기훈이와 석이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김 선생님도 가만히 나뭇잎을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살랑살랑 흔들립니다. 간지럽다는 듯이 이쪽저쪽으로 팔랑팔랑 흔들립니다.
‘바람이 부나?’
김 선생님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자랑하는 간지럼 타는 나무를 그대로 믿고 싶었습니다.
“우리 섬이 조용하고 깨끗하다고 사람들이 많이 와요.”
“그래요, 요새는 일요일이면 우리 섬으로 등산 오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들 땜에 너무 복잡해요.”
흔들리는 것이 간지럼을 타는 건지 부끄럼을 타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바람을 타는 건지 아직 판단이 안서는 김 선생님은 아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섬을 너무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으로 김 선생님은 굴참나무를 가만히 껴안아 보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도회지의 큰 학교에서 몇 년을 보냈던 김 선생님은 그 때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곳의 아이들은 한결같이 굳은 얼굴입니다. 손을 잡아주고 마음을 주어도 웃을 줄을 몰랐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시간에 쫓겨 종종 걸음으로 다녔습니다. 선생님의 말을 믿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섬마을 아이들은 간지럼 타는 굴참나무와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면 함박꽃처럼 웃는 섬 아이들. 바다처럼 넉넉한 마음인 섬 아이들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 몇 개가 둥둥 떠 있는 토요일 오후, 김 선생님은 스케치북을 들고 간지럼 타는 나무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멀리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보입니다.
‘다시 한번 해 볼까?’
김 선생님은 굴참나무를 살살 쓰다듬었습니다. 바람이 부는 걸 느끼지도 못했는데 잎이 흔들거립니다.
“어?”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한 일입니다.
김 선생님은 나무 밑에 앉아서 눈을 감았습니다. 또로로롱 새소리가 들립니다. 잔잔한 바다 물결도 느껴집니다.
잠시 후, 깜짝 놀라서 눈을 떴습니다.
“사람들은 이 섬을 찾아 우리들 나무와 꽃과 바다를 구경한다고 생각하지요.”
누구 목소린가 싶어 화들짝 놀란 김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잠깐 졸았나?’
그런데 다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 옆의 굴참나무랍니다.”
“예?”
김 선생님의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경치를 보고 좋아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을 구경해 요.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이거든요. 우리가 자기들을 구경하고 살피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른 채 말이에요.”
김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굴참나무를 올려다보며 눈만 껌뻑거렸습니다. “사람들은 쉬고 싶어서 이 섬을 찾지만 우리들은 쉬지 못하죠. 섬사람들하고 바 깥사람들의 생각이 왜 그렇게 다른지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답니다.”
“예에.”
어느새 김 선생님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구경에 우리도 바쁘답니다. 우리가 다 보고 있다는 것은 생각 지도 못하구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슬쩍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우리 옆에 와서 다른 사람을 헐뜯고 욕하는 경우도 많고. 후훗!”
“저도 생각지도 못했는걸요. 오히려 나무가 우리 사람들을 구경하다니요!”
김 선생님은 자기를 지켜보는 숱한 눈길들을 생각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만 우선이지요.”
김 선생님은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듯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이용해서 편리하게 만들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용당하고 관찰 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도 살아있거든요.”
목소리가 한결 경쾌하게 들렸습니다. 김 선생님은 퍼뜩 자세를 바로 하고 살포시 눈을 떴습니다.
굴참나무에 기댄 채 바다에서부터 하늘로 눈동자를 돌린 김 선생님은 한들한들 움직이는 나뭇잎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스케치북에 손도 안댄 채로 산을 내려오는 김 선생님은 풀 한포기도 그냥 스쳐지 나는 게 마음이 쓰입니다. 그러나 내일 아이들에게 들려줄 간지럼 타는 나무의 숨은 이야기에 더 신이 납니다. 분명 이 섬마을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믿어줄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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