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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글두르의 낙타

박산향 2009. 4. 12. 17:08

  투글두르의 낙타

                                                            박산향 (2007년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연간집)


  사막에도 꽃이 피었다. 하늘하늘 노란 양귀비도 피어났고, 꽃잎에 까만 점 하나씩 박힌 하얀 별꽃도 피었다.   

  모래먼지, 흙바람이 폴폴 날리는 평원을 지나 얼음계곡 입구에서부터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렀다. 물줄기 양 옆으로는 초록이 짙었고, 간간히 초르르 물 흐르는 소리도 났다. 협곡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물소리는 커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는 없다. 간혹 무릎 높이도 안 될 성싶은 분재 같은 나무가 바위 언덕에 보이긴 했다. 가끔씩 산 중턱에는 산양이 풀을 뜯다 가곤 했다.

  온통 바위산으로 된 얼음계곡은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곳으로 사막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신비로운 장소가 되었다. 얼음계곡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사막 한 가운데 이런 곳이 어떻게 생겼을까 모두 놀랄 따름이었다.

  투글두르는 언젠가 조각 아저씨께 물은 적이 있었다.

  “아저씨. 여긴 왜 이렇게 시원하지요? 조금만 나가도 뜨거워죽을 지경인데.”

  “계곡이 워낙 깊어서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으니 시원할 수밖에.”

  아저씨는 사막에도 이 정도의 선물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덧붙이셨다.

  투글두르는 얼음계곡 입구 길목에서 낙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오늘은 어쩐지 예감이 좋아.”

  투글두르는 낙타의 등을 살살 쓸면서 이야기를 했다. 일부러 협곡의 경치와 낙타가 잘 어울리는 곳에 앉아서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투글두르 말고도 낙타와 함께 대여섯 명이 얼음계곡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어른이었고, 투글두르 같은 소년은 없었다. 

  조금 있으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올 시간이다. 이곳에 들렀다 점심을 먹거나 아예 점심을 먹고 오기 때문에 투글두르는 얼추 그들이 움직이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  

  “투글두르!”

  “아저씨 나오셨어요?”

  “그래. 오늘 기분은 어떤 것 같니?”

  “이 녀석이 아직도 기운이 없어요. 일어서기도 귀찮아하는 것 같고.”

  “너무 늙어서 그래. 투글두르, 오늘도 잘 해보자.”

  “예, 아저씨.”

  조각 아저씨는 보따리를 하나 메고 얼음계곡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 가셨다. 시원한 물줄기 옆  바위 위에 앉아서 나무로 동물들을 조각하는 일이 아저씨의 일이었다. 낙타, 다람쥐, 양, 염소를 주로 깎았는데 그 중에서도 아저씨의 낙타 조각은 대단했다.

  조금 있으니 웅성웅성 사람 소리가 들렸다. 얼음계곡에 들어오려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 킬로미터 정도는 걸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투글두르는 낙타 봉 부위의 털도 가지런히 하고 안장도 말끔하게 정리했다.  

  사람이 제법 많은 걸로 봐서 아마 낙타를 타고 싶다는 사람이 몇 명은 될 것 같았다.

  “낙타 태워드립니다. 낙타 타세요!”

  투글두르는 낙타 옆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 낙타다! 태워주나 봐요.”

  “얼마예요?”

  한 여행객이 물어보기 시작하면 우르르 모여드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비슷했다.

  “5 달러.”

  옆 낙타 주인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낙타의 안장을 가다듬으며 타라고 재촉했다. 이럴 때는 가만있어도 투글두르의 낙타도 찾게 되어 있는 법이다. 타려고 하는 사람이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투글두르. 조심해라. 니 낙타가 아무래도 많이 아픈 모양인데.”

  벌써 여행객을 태운 아저씨가 투글두르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예. 걱정 마세요.”

  투글두르는 일부러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먹지도 않은 낙타를 매일 데리고 나오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먼 친척한테 늙은 낙타를 하나 얻은 것만으로도 부모님이 안 계신 투글두르에겐 천만다행이었다.    

  “자, 천천히 일어서. 손님 놀라지 않게 천천히!”

  앉은 채로 여행객을 태운 낙타가 기다란 뒷다리부터 벌떡 일어서면 몸이 바짝 앞으로 쏠리게 된다. 그때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면 사실은 낙타도 놀라게 되는 것이다. 뒷발 다음으로 앞발까지 일으키면 낙타 등에 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우와!”

  투글두르는 고삐를 잡고 앞서서 조심조심 걸었다. 얼음계곡의 물소리가 가슴속에까지 초르르르 스며들었다. 물줄기를 따라 걷기도 하고, 건너기도 하고, 돌 사이에 핀 들국화를 지나기도 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낙타 위에 탄 사람과 말이 안 통하는 게 어쩌면 다행인지 모른다고 투글두르는 생각했다. 혼자서 낙타에게 말을 하고 혼자서 생각하며 계곡 사이를 걷는 게 좋았다.

  협곡의 깊은 곳에서 여행객을 내려주었다. 더 이상은 바위뿐이고 물도 많아서 낙타가 들어가지는 못하는 곳이다. 받은 지폐를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저씨!”

  바위 위에 조각 아저씨가 보였다. 잠시 낙타를 앉혀두고 아저씨에게로 달려 간 투글두르는 아저씨를 둘러싸고 조각품을 구경하는 여행객들 틈을 비집고 아저씨 옆에 앉았다.

  “와, 멋지다.”

  투글두르도 아저씨의 조각품을 이리저리 감상했다. 여행객들은 직접 나무로 양을 조각하는 아저씨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옆에 놓아 둔 작품들을 고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거요!”

  한 여행객이 아저씨 바로 옆에 있는 낙타 조각품을 집었다.

  “노! 이건 팔지 않아요.”

  아저씨는 손사래를 치며 팔지 않는 거라고 말했다. 하긴 그 낙타는 아저씨가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많은 여행객들이 욕심을 냈지만 절대 팔지 않았다.    

  아저씨는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징키스칸을 연상시키는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조각 솜씨는 여행객들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덕분에 얼음계곡에서 조각 아저씨가 제일 수입이 좋았다.

  조각 낙타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눈매도 그윽하고, 봉이나 배 부분의 털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았다.

  아저씨의 조각품들이 대여섯 개 팔렸다. 보따리에서 조각품을 몇 개 더 꺼내놓는 아저씨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번졌다.  

  “아저씨. 그런데 왜 이 낙타는 안 팔아요?”

  “내 분신이니까.”

  “그래도 비싸게 받을 수 있을 텐데. 똑 같은 걸로 또 깎으면 되잖아요?”

  “이 녀석하고 똑같이 깎을 수는 없어.”

  “에이, 아저씨 솜씨가 얼마나 좋은데요.”

  “이 녀석은 내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놈이라….”

  “예?”

  “그런 게 있단다. 그런데 투글두르! 니 낙타는 어떻게 할 셈이냐?”

  아저씨는 이야기를 돌렸다.

  “어쩌긴요.”

  “내 생각엔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투글두르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벌써 육 년째 같이 지낸 낙타를 어디로 보낸다는 말인가.

  “모두 헤어지는 거란다. 편히 보내주는 게 주인 된 도리이고.”

  아저씨는 투글두르의 눈빛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중에 돌아갈 때 제가 태워드릴게요.”

  투글두르는 서둘러 일어서서는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한번 씻었다.

  ‘어쩌지? 어떻게 저 녀석이랑 헤어져?’

  투글두르는 막막하기만 했다. 마을 어른들에게 부탁하면 금방 처리해주겠지만 여태껏 버티고 있었던 것도 투글두르의 고집이었다. 가족과 같은 낙타를 떠나보낸다는 건, 또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건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다.

  투글두르의 낙타는 오후에 두 번 더 여행객을 태웠다. 한 발짝 한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겨워하는 낙타를 쓰다듬어 주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투글두르의 가슴도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으음….”

  그날 밤 유난히도 끙끙 앓는 낙타 곁에서 투글두르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은 은하수로 가득한데 투글두르의 가슴은 텅텅 비어만 가는 듯 했다.

  이른 아침 마을 어른을 찾아갔던 투글두르는 그 후로 며칠 동안 꿈쩍도 않았다.

  “투글두르!”

  조각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누워있던 투글두르가 몸을 일으켰다.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 때문에 더 말라 보이는 데다 커다란 눈마저 쑥 들어가 있었다. 

  “잘 했다. 누구나 한번은 떠나는 거야. 동물이든 사람이든.”

  투글두르의 홀쭉한 볼에 뚝뚝 눈물이 타고 내렸다.   

  “언제부터 얼음계곡에 나올 거니? 마을 분들 이야기 들었다.”

  마을 어른의 낙타 두 마리를 얼음계곡에서 맡기로 한 투글두르는 오늘이라도 계곡으로 나가야 했다.

  “좋은 곳으로 갔을까요?”

  “그럼, 이제 아프지도 않고 편안할 거야.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지 않니?”

  “정말요?”

  조각 아저씨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투글두르도 따라 웃었다.

  “자, 선물이다.”

  아저씨가 꺼내 놓은 것은 아저씨가 아끼는 조각 낙타였다. 누구에게도 팔지 않았던 아저씨의 낙타를 잘 알고 있는 투글두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 이건….”

  “너에게 주는 거야. 니 낙타만큼은 아니래도 좋은 친구가 될 걸.”

  “아저씨!”

  조각 아저씨는 투글두르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나가셨다.

  조각 낙타를 받아 든 투글두르는 뚫어져라 낙타를 바라보았다. 투글두르를 태운 낙타가  뚜벅뚜벅 걸었다. 그들 뒤로 석양이 발갛게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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