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이 아니라 나즈막한 동네산을 짬짬이 오르고 있다.
숲길을 걸으며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다.
들꽃의 인사도 받는다.
산 속의 이 친구들은 자기 순서를 기다릴 줄 안다.
절대 앞서지 않고 때가 되어야 모습을 드러낸다.
입추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바람의 손길이 달라졌다.
훅훅 내뿜던 한여름의 열기를 살짝 덜어냈다는 느낌이 온다.
뜨거웠던 올 여름이 이렇게 뒷걸음 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뭇잎 끝자락의 색도 달라보인다.
조금더 지나면 단풍이 시작될 거라는 신호를 주는 듯하다.
은퇴까지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렸던 한 선배는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야위어 가는 몸을 달래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난 삶은 병과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남았지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일지 모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살라는...
숲속 식구들이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듯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지 않을까.
땀을 닦으며 숲길을 빠져나왔다.
여름 볕을 막아주며 수고한 나무들에게 까실까실한 가을 하늘을 선물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