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수다

대도시의 사랑법

박산향 2020. 3. 25. 13:31

하얗고 도도하게 피어났던 하얀 목련이 툭 고개를 꺾기 시작하자 흰분홍의 벚꽃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봄이다

꽃들이 피는 것과 동시에 사랑의 마음도 솟아나는 듯한, 그래서 누구 손이라고 잡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에 조금 낯설고 아픈 사랑을 만났다.


박상영의 동성애 연작소설대도시의 사랑법은 봄꽃 옆자리를 조용히 걸으며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다. 박상영은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 2018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그 문학성을 인정받게 된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30대 초반의 작가 이 사랑과 삶의 소용돌이를 뚫고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내용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사랑의 모습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대부분 사람들은 인식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성애에 대한 시선도 호의적일까. 작품속의 동성애 주인공들이 스스로 움츠려들고 숨기려하는 장면들에서 사회적 편견이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첫 번째 수록 단편재희에서 게이인 와 여성 재희는 만난 남자들에 대해 수다를 떨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다. 연인관계는 아니지만 연인처럼 가까웠던 재희가 스토커 남자에게 위협받은 사건을 계기로 둘은 같이 살게 된다. 재희와 나는 많은 일을 함께 겪는다. 재희는 숱하게 남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으며 임신중절수술도 하고 취업 준비에도 열중한다. ‘는 연인 ‘K3'를 죽음으로 떠나보냈으며, 20대에 작가로 등단까지 하게 되었다. 20대의 큰 사건들을 함께한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청춘기와 재희가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다소 코믹하게 그려진다. 재희의 결혼식 날 목이 메여 축가를 엉망으로 부른 나, 웨딩드레스를 끌며 재희가 나서 노래하며 두 사람은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나는 쓸쓸히 깨닫는다.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는 마지막 구절이 어쩐지 짠하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다. 동성애 등 성소수자를 받아들이기 힘든 가족과의 대립과 갈등을 이 단편에서는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6년 만에 암이 재발하여 투병 중인 엄마를 간병하는 화자 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두 살 연상의 형과 키스하다가 엄마에게 들킨다. 아들을 정신병원까지 데려가지만 엄마는 종교를 내세워 상담과 치료를 모두 거부하고 그 모든 일은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에 대해 포기를 모르는사람이자 “40년차 기독교인으로 끊임없이 나를 붙잡고 늘어진다


엄마를 간병 중 5년 전에 뜨겁게 사랑했던 형의 편지를 받고 다시 마음이 요동치며 과거를 떠올린다. 철학 강좌에서 만나 연인이 되었지만 그 형은 알면 알수록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학생운동을 한 과거에 여전히 사로잡힌 채 아직도 정부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자신이 게이임에도 동성애라는 악습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별난 사람이었다


아들의 결혼에 대한 엄마의 집착과 공격을 화자는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일까. 엄마의 상실감이 화자의 아픔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에 대한 감정은 엄마의 말기 암으로 더 우울하고 슬프다. 엄마라는 존재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성찰에 이르는 주인공이 안타깝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이 절절하게 전해져온다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의 주인공 는 클럽에서 진탕 취하는 일이 다반사고, 연극 프로그램 북을 팔며 글을 쓰는 인물이다. 파트너의 부주의로 HIV에 감염되어 약을 먹고 있기도 하다. 자주 가던 클럽의 바텐더이자 간호조무사 지망생인 규호와의 단조롭지만 안정적인 연애는 중국합작 병원으로 규호가 떠나면서 변화를 맞는다. 나도 중국 주재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숙환으로 포기하고 규호만 떠난 것이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대도시의 사랑법과 연결되는 작품으로, 홀로 방콕을 여행하는 의 이야기다. 규호가 떠나고 그렇게 둘은 이별을 맞이했음을 이 단편에서 알게 된다. 나는 규호와 함께했던 추억을 방콕 곳곳에서 떠올린다. 늦은 우기의 축축한 분위기는 다른 작품에서 보이던 웃음기를 거두고서 상실과 고독의 정서에 집중하게 만든다. 예전, 그날 규호와 날렸던 풍등은 높이 떠오르지 못했다. ‘는 풍등에 쓸 문장을 여러 번 고쳤지만 결국 규호두 글자만 남겼었다. 날아올라 사라진 풍등이 규호였을까, 아님 의 희망이었을까. 마지막 부분의 여운이 결코 가볍지 않다


퀴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담은 우리 문학작품이 많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박상영은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청춘의 삶, 사랑 문제에서는 경쾌한 필치를 보이며, 가족의 문제에서는 깊은 고민으로 매력을 보인다. 앞으로 박상영이 펼쳐갈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할까를 기대하게 만드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