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야
나는 나야 (2006년 어린이문예5,6월호)
태권도 체육관엘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 얼굴이 심상치 않다. 잔뜩 부은 얼굴이라 조금만 신경을 건드려도 날벼락이 떨어질 것 같다.
“다녀왔습니다!”
이런 날일수록 큰소리로 인사하고, 밝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씻고 숙제 할게요.”
나는 엄마 눈치를 보며 욕실로 들어갔다. 쓱쓱 비누 거품을 냈다. 미끌미끌한 느낌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알림장을 뒤적거렸다. 일기쓰기, 수학 익힘책 14-15쪽 풀어 오기, 저금 가져오기.
그러나 나는 숙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짝지한테 빌린 만화책이 가방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의 분위기로 봐서 만화책을 봤다가는 난리가 나겠기에 잠시 공부하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아휴, 속이 상해서 원. 진경이 너 땜에 내가 죽을 맛이다.”
역시 또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나는 못 들은 척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앞집에 민수는 또 반장이라는데 너는 반장 언제 한 번 해볼래?”
엄마는 그새 내 옆에 서 계셨다.
“만날 부반장이나 하고. 아이구, 내가 속이 터진다, 터져.”
엄마는 민수가 반장이 되고, 나는 부반장 밖에 아니라고 불만을 늘어놓으셨다.
“그래도 부반장 됐잖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지만 엄마는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우리 반은 어제 반장 선거를 했고, 앞집 민수네 반은 오늘 했다. 어제만 해도 엄마는 반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부반장이 된 걸 좋아하는 눈치였다. 아빠께 전화를 걸어 내가 부반장이 되었다고 일러주시는 걸 보면 그래도 엄마의 기분이 꽤 괜찮았다. 그런데 오늘 엄마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민수가 반장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화가 나신 것이다.
“그래, 잘났다.”
엄마는 내가 또래보다 처지거나 못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신다.
“너는 왜 못하니!”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지만 내가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이럴 땐 얌전히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엄마의 화를 돋우면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갈 것이고,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부반장도 하기 싫은데, 엄마 땜에 하는 거구만.’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엄마들은 왜 그럴까? 우리 맘도 모르면서.’
엄마는 현관에서 툭툭 소리를 내며 신발장 정리를 하시더니 시장에 다녀온다고 나가셨다.
“휴우, 살았다!”
베란다로 나가서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조그맣게 보였다. 이제 만화책부터 보면 된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낮은 질그릇 화분에 눈이 갔다. 팻말에는 ‘앵초’라고 적혀 있다.
“어머나, 꽃이 피었네. 이렇게 예쁠 수가!”
꽃이 한 송이 피면 엄마는 흥분하시면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정해주신다. 그래서일까, 꽃이 핀 화분 때문에 한쪽 구석자리로 밀려난 앵초가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생동생동한 앵초 잎사귀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 저절로 빙긋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른 만화책부터 꺼냈다. 먼저 만화책을 보고나서 엄마 오실 시간쯤에 수학 문제를 풀면 된다.
“역시 나는 계산이 빠르단 말야.”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불공평하다. 어른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강요만 한다.
만화책 두 권쯤은 30분도 안 걸린다. 나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만화책을 폈다.
지민이, 수민이는 쌍둥이다. ‘둥이네’로 유명한 이 집은 지민이가 언니고, 수민이는 10분 늦은 동생이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심지어는 동네 분들까지 지민이와 수민이는 무엇이든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옷을 입었고, 같은 신발을 신었고, 가방도 똑같은 걸 멨다. 학교에서는 같은 반에 둘을 넣어주었고, 학용품도 같은 걸 썼다. 그런데 지민이와 수민이는 성격이 딴판이다. 지민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반면에 수민이는 쾌활하고 적극적이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더니 3학년이 되고부터는 수민이가 반기를 들었다. 지민이와 같이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태권도를 다니겠다고 우겼다. 여자가 무슨 태권도를 하냐고 엄마가 말렸지만 막무가내로 졸라서 태권도를 배운다. 긴 머리도 짧게 잘랐다. 쌍둥이에게 즐겨 입히던 원피스도 싫다고 거부하고 바지를 고집했다. 처음엔 엄마가 거세게 반대를 했지만 고집 센 수민이에게 결국은 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점차 똑같은 지민이와 수민이가 아니라 지민이는 지민이 대로 보고, 수민이는 수민이 대로 느끼게 된다. 수민이는 태권 소녀로 선수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수민이기라도 한 듯이 기분이 상큼해졌다. 다음 권은 내일 빌려야지 생각하며 시계를 봤다. 엄마가 오실 때가 된 것 같다.
“이제 슬슬 숙제를 해 볼까.”
수학 익힘책을 꺼냈다. 문제도 술술 잘 풀린다.
‘아참! 오늘이 목요일, 영어 선생님 오시는 날!’
그 생각이 들자 서둘러 지난 시간에 배운 영어 복습을 하기 시작했다. CD를 넣어 영어를 듣고 있는데 엄마의 문 따는 소리가 들린다.
“다녀오셨어요?”
나는 현관 앞으로 잽싸게 나가서 엄마 장바구니를 받아들었다.
“뭐 하고 있었니?”
“영어 공부요. 오늘 선생님 오시는 날이라.”
“그래. 들어가 계속해라.”
엄마는 나가실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말투였다. CD플레어에서 들려오는 영어 발음이 리듬을 타고 구른다. 나도 따라 소리를 내보지만 들리는 것처럼 똑같이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최대한 혀를 굴려서 따라한다. 그러다가 어찌 잘못하면 혀가 꼬이기도 한다.
“우리가 미국 사람인가. 미국 사람하고 똑같이 말하게.”
얼마 전에 사촌 형이 내게 들려 준 말이다. 형은 우리는 우리 식으로 발음하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엄마를 비롯한 영어선생님, 아빠는 내가 유창하게 영어를 말하길 바라신다. 몇 년째 영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해도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
영어 선생님과 공부를 마치고 선생님은 엄마와 말씀을 나누셨다.
“이번에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8층에 사는 현진이가 대상을 받았어요.”
에구머니나. 선생님이 저러시면 엄마가 또 화가 나실 텐데. 나는 엄마 표정을 힐끗 살펴보았다. 웃는 표정이 영 어색하다.
“잘 됐네요. 현진이 엄마한테 한 턱 쏘라고 해야겠어요.”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걱정이 앞섰다. 그 화살은 도 내게로 올 것이다.
“우리 진경이는 어떤가요? 많이 늘긴 했나요?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네요.”
잘한다고 해주시면 좋으련만 선생님께선 열심히 하고 있다고만 하셨다.
“똑같이 시작했는데 우리 진경이만 진도도 느리고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내 쪽을 흘겨보았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수돗물을 틀었다. 주르르 물이 흘러나온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영어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머지 말씀을 하셨다.
“거 봐라. 할 때 열심히 하라고 했더니 너는 왜 그런 것도 못하니. 남들은 다 잘만 하는데!”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씩씩하게 나가야 엄마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마지막까지 톡 쏘신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나는 엄마가 모르게 살짝 웃었다. 엄마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엄마도 나를 알고 계실까?
유치원 때는 엄마가 자랑스럽고 좋았다. 2학년 때만 해도 엄마가 나를 많이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엄마가 나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셨다. 남보다 처지거나 못하는 건 참지 못하고 나를 몰아세우신다.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태권도, 일주일에 세 번은 미술학원 가기, 집으로 오시는 영어, 한자, 논술, 수학 선생님. 컴퓨터 자격증 공부. 학교에 갔다 오면 어떻게 하루가 가는지 모르는데 엄마는 바둑까지 배우는 게 어떠냐고 물으셨다.
물론 나는 엄마 말씀을 잘 듣는 아들이다.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고 있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 속으로 ‘싫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가끔씩 토요일 오후에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큰 소리로 노래 몇 곡 부르면 기분이 나아지곤 한다.
엄마는 저녁 때 앞집 민수네 집으로 가셨다. 민수 엄마께서 반장된 기념으로 엄마들한테 한 턱 내기로 하셨다고 한다.
“나는 언제 반장 엄마라고 한 턱 내냐? 내년이 6학년 마지막인데 가능한지 모르겠다.”
내키지도 않는데 간다면서 혼잣말처럼 하신 말씀이다.
아빠도 늦으시고 텔레비전이나 볼까 하다가 오늘 같은 날은 엄마 눈치가 보여서 그만두었다. 한자 쓰기를 하고 일기를 쓰고 나니 할 일이 없다. 컴퓨터 게임이 생각났지만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냥 일찍 잠이나 자자.’
잠을 자면 복잡한 생각들이 없어서 좋다.
몇 시쯤인지 모르겠지만 잠결에 엄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아니 어쩜, 우리 집에는 저 앵초가 꽃을 피울 생각도 안하는지 몰라. 민수 엄마하고 같이 가서 샀는데 그 집에는 꽃이 예쁘게도 피었더구만. 애나 꽃이나 어째 앞설 줄을 모르냐. 정말 짜증이 나서 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낮에 베란다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본 앵초 화분. 상추 잎사귀처럼 탐스럽게 자란 잎이 참 근사했다. 무심코 들여다보다가 큼직한 잎사귀 사이에 뾰족이 솟고 있는 꽃대가 틀림없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꽃대가 자라고 꽃이 필 텐데 엄마는 왜 기다리지 못하고 저러실까.
‘나 닮은 불쌍한 앵초. 아침에 물이나 흠뻑 줘야겠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