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향이 동화

가면놀이

박산향 2008. 4. 8. 08:32

 

2006년 푸른문학상 수상작품집.

 

 

 

 

   오늘을 사는 아이들의 내면 <가면놀이>

-------------------------------가면놀이/제4회푸른문학상동화집/박산향/푸른책들

말죽거리 잔혹사의 초등버전이라고나 할까? 아니다. 과장이다. 발단은 흡사하나 마무리가 명백히 다르다. 소심한 주인공은 감히 몸집을 키워 음의 세력과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울분을 터뜨리다 장렬하게 산화하는 곳은 요즘 아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 월드와이드웹이다.


번개 : 오늘 학교에서 기분 나쁜 애 한 대 때려 줬어.
장군 : 그래?
번개 : 자꾸 내 친구를 못살게 하잖아. 코피까지 내고.
장군 : 왜?
번개 : 복도에서 발을 걸었어. 그 나쁜 자식이
장군 : 복수한거야?
번개 : 원래 나쁜 애야. 오늘은 참을 수가 없더라고.
장군 : 그래서?
번개 : 정글짐 쪽으로 불러 내서 한 대 때려줬어.
장군 : 잘 했다.
번개 : 그랬더니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라.


슬프다. 이런 억지는 얼마만큼의 위로를 줄까? 마치 성석제 소설의 '황만근'이나 노신의 '아큐정전' 속 정신승리법 같다. 밖에서 상처입은 영혼은 매일 밤 슬그머니 컴퓨터로 들어가 숨는다. 그리고 번개로 변신하여 장군에게 가장 깊은 내면에서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주장하고 만다. 과연 이 주인공의 처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동생 선재는 공부에 운동까지 잘해 밥도 잘먹는다. 그덕에 덩치도 커서 늘 형인 선우와 친구처럼 보인다. 선우는 학교에서 힘쓰는 경식에게는 아무말도 못하고 당한다. 영어연극에 나가고 싶지만 선뜻 의사표현도 못한다. 선생님의 관심에서도 늘 멀다. 선우의 고백 한 대목은 책을 읽는 선생님을 미안하게 한다.


선우는 정말 화가 났다. 공부를 썩 잘해서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하는 것도, 키가 큰 것도 아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있으니 선생님도 관심있게 봐주지 않는다. 친구라야 정민이와 지훈이 뿐인데, 지훈이가 코피가 나도 경석이한테 당당하게 따지지 못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선우는 그런 자신이 미웠다.


맞는 말이다. 늘 얌전하고 자기 할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아이들이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말썽꾼들이 선생님 시선을 독차지 하고, 그 다음으로는 똑똑한 녀석들이 학업성취수준으로 눈길을 끈다. 그러니 이도저도 아닌 아이들은 정말 미안할 정도다. 선우는 그런 아이였다. 선생님 눈에 참 편안해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의 내면은 어쩌면 이렇게 숯덩이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작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질만한 갈등의 상황을 잘 골랐다. 그리고 차곡차곡 슬픈 실타래를 엮었다. 극복해 나가는 방법 또한 가감없이 보여준다. 천사처럼 맑고 투명한 영혼을 가진 아이들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늘 치열하게 자신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인간으로.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사회 구성원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름의 타고난 캐릭터 안에서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세상이다.

명랑쾌활에 씩씩하고 영특한 동생과 늘 비교되는 형의 괴로움과 열등감은 가정 밖에서의 생활로 질기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쩌면 선우가 보기좋게 그런 현실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적 구성으로서의 멋진 결말을 보여주었다. 인터넷 채팅으로 썼던 가면만 스스로 벗게 한 것이다. 그 실체가 만천하에 공개되기 바로 직전에. 그리고 끝이다. 가르침도 설득도 뉘우침도 없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문학적 배려가 아주 마음에 든다. 첫작품인데 앞으로 기대가 크다.

이제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우선 요즘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주었다는 것에 깊히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소통하려고 하는 억지, 그 끝이 얼마나 더 비참하고 외로운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을 개운하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 아이들 내면에 관심을 갖게 한다. 한바탕 놀이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선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모두 세편이 실려 있는데 김리리의 <천타의 비밀>, 최은영의 <할아버지의 수세미 밭>도 재미있게 읽었다.